야구장에서 비를 만난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2025년 5월 23일, 인천 문학구장(SSG 랜더스필드). 상대는 LG 트윈스였다.
직관을 다니다 보면 언젠가 한 번은 겪는다는 비. 그게 그날 나한테 왔다. 결론부터 말하면 — 9회말까지 비를 쫄딱 맞으며 응원했는데, 우리 팀은 3:2로 역전패했다. 그 허탈함을 적어두려고 한다.
평소처럼 시작된 경기
그날도 여느 직관과 다르지 않았다. 자리에 앉아 평소처럼 먹을 걸 챙겨놓고(문학 오면 크림새우는 국룰이다), 맥주 한 잔에 경기를 보고 있었다. 초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이대로 기분 좋게 이기나 싶었다.
돌이켜보면 그때가 그날의 마지막 평화였다. 입문한 지 얼마 안 된 나에게 문학은 아직 모든 게 새로운 구장이었고, 나는 그 분위기에 젖어 아무 걱정 없이 경기를 즐기고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볼 생각 같은 건 전혀 하지 못했다.
비가 오기 시작했다
문제는 경기 중간에 비가 내리기 시작한 거였다.
처음엔 '뿌리다 말겠지' 했는데 점점 굵어졌다. 우산도 우비도 미처 챙겨오지 않은 상태. 자리에서 일어나 매점이며 처마 밑이며 돌아다녀 봤지만, 비 오는 날 야구장에서 몸을 피할 곳을 찾는 건 쉽지 않았다. 다들 같은 생각이라 북적였다.
비는 금방 스탠드를 적셨다. 시멘트 계단에 빗물이 고이고, 챙겨둔 크림새우 봉지는 눅눅해졌다. 맥주잔엔 빗물이 섞여 들어왔고, 옷은 어느새 몸에 척 달라붙었다. 응원가 사이사이로 빗소리가 끼어드는데, 그제야 '아, 이게 말로만 듣던 우천 직관이구나' 싶었다. 남들이 겪는 얘기로만 알던 걸 그날 처음 몸으로 겪는 중이었다. 신발 안까지 물이 스며들 무렵엔, 이미 옷을 말리는 건 글렀다는 걸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 그날 나를 살린 것 — 차에 있던 우산
다행히 차에 우산이 여러 개 굴러다니고 있었다. 빠르게 주차장으로 가서 우산을 챙겨 돌아왔더니, 그제야 비를 신경 쓰지 않고 경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날 깨달았다. 직관 갈 땐 날씨 맑아도 우산·우비 하나쯤 챙기거나, 차에 비상용으로 두는 게 진짜 편하다는 걸.
사실 주차장까지 다녀오는 그 몇 분이 은근히 길었다. 이미 젖을 대로 젖은 채로 빗속을 뛰어갔다가, 우산 몇 개를 겨드랑이에 끼고 돌아오는 길엔 헛웃음이 났다. 준비물 하나 제대로 못 챙겨 와서 이 고생을 하는구나 싶으면서도, 차에 우산을 굴려둔 과거의 내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9회말까지, 비를 맞으며
우산을 챙긴 뒤로는 마음을 굳혔다. 끝까지 본다.
경기는 손에 땀을 쥐게 흘러갔고, 비는 그치지 않았다. 그래도 자리를 안 떴다. 9회말까지, 비를 맞아가며 목이 터져라 응원했다. 입문한 지 얼마 안 된 내가, 비 오는데도 안 가고 끝까지 소리 지르고 있는 걸 보며 스스로도 좀 웃겼다. '나 진짜 빠졌구나.'
비를 맞으며 앉아 있으니 몸은 어느새 으슬으슬했다. 그런데도 경기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점수가 한 점 차로 좁혀질 때마다 젖은 것도 잊고 벌떡 일어났고, 목이 쉬도록 응원 구호에 목소리를 보탰다. 비가 오면 집중이 안 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 반대였다. 불편한 만큼 더 몰입하게 되는, 이상한 밤이었다.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로도 눈은 그라운드에 붙어 있었다. 손이 시려 응원 도구를 쥔 손가락이 잘 안 펴졌는데, 그마저도 그 순간엔 대수롭지 않게 느껴졌다. 평소 같으면 진작 '이만 갈까' 했을 나인데, 그날은 젖은 몸으로 끝까지 버티고 있는 스스로가 낯설면서도 싫지 않았다. 언제 이렇게 뭔가에 푹 빠져봤나 싶은, 오랜만의 감각이었다.
그런데 — 그 정성이 승리로 이어지진 않았다. 3:2. 역전패였다. 먼저 앞서갔던 경기를 내리 뒤집혔고, 9회말 1점 차까지 쫓아갔지만 거기까지였다.
우천 직관, 비 맞고 진 날의 묘한 기분
이상하게 그렇게 분하지만은 않았다. 비 쫄딱 맞고, 결과도 졌는데, 집에 오는 길엔 "그래도 끝까지 봤다"는 이상한 뿌듯함이 남았다. 경기가 끝나고 젖은 스탠드를 빠져나오는 길, 온몸은 무겁고 축축한데 마음은 이상하게 가벼웠다. 분명 진 경기인데 발걸음이 그렇게까지 처지지 않는 게 스스로도 신기했다. 이기는 날만 기억에 남는 게 아니더라. 고생하며 본 날이 더 오래 남는다.
차에 타서 히터를 켜고 젖은 몸을 말리는데, 창밖으로 아직 불이 켜진 구장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히 졌고, 감기 걸리기 딱 좋게 비까지 쫄딱 맞았는데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이겼으면 그냥 '좋은 경기였네' 하고 넘어갔을 텐데, 지고 나니 오히려 그날의 장면 하나하나가 더 또렷하게 남았다. 비 냄새, 눅눅해진 응원 도구,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순간까지 전부.
그러고 보면 야구를 보는 재미는 이기고 지는 데만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어떤 날은 날씨가, 어떤 날은 함께 간 사람이, 어떤 날은 그날의 고생이 경기보다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비 오는 문학에서의 그날도 나에겐 그런 날 중 하나로 남았다. 이기고 지는 것보다 오래 남는 날이 있다는 걸, 그날 비를 맞으며 처음 알았다.
우천 직관을 끝내고 젖은 채로 돌아오며 혼자 떠올린 것들
- 맑아도 우산·우비 챙기기. 야외 구장은 날씨가 변덕스럽다. 차에 비상용 하나 두면 든든하다.
- 갈지 말지 미리 판단. 비가 많이 오면 경기가 중단되거나 취소될 수도 있다. (취소·환불 기준은 구장·상황마다 다르니, 가기 전에 구단 공지나 안내를 확인하는 게 좋다.)
- 그래도 한 번쯤은 비 맞고 봐도 괜찮다. 추천까진 못 해도, 그날의 기억은 확실히 진하다.
9회말까지 비를 맞아가며 목이 터져라 응원했는데, 남은 건 3:2 역전패라니. 야구는 참… 마음대로 안 된다. 그걸 알면서도 결국 또 보러 가게 되는 거겠지만.
경기 정보(2025년 5월 23일 인천 SSG-LG, 3:2)는 KBO 기록 기준입니다. 우천 취소·환불 규정은 구장·시즌에 따라 다를 수 있으니 방문 전 구단 안내를 확인하세요.